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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극장은 극장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눈길을 끄는 외관은 일반인에게 사원을 연상시키고,
화려한 실내장식은 그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신비로움을 더해주며,
오페라 무대는 종교의식과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오페라극장이 새로운 작품을 위촉하거나 사랑받는 고전작품들을
새로운 청중에게 들려줌으로써 오페라라는 예술이 살아남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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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일찍 세워진 17세기 베니스의 오페라극장들은 모든 계층들에게 다가갔다. 이러한 접근성 덕분에 오페라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과 나라 밖에까지 빠른 속도로 퍼져 대중적 유희물이 되었다. 제일 먼저 베니스에 오페라극장이 세워진 후 곧이어 볼로냐, 나폴리, 밀라노 그리고 그 후엔 런던, 비엔나, 파리로 퍼져나갔고 그 수가 배로 늘어나면서 오페라극장들은 보다 많은 청중들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이들 중 아직 남아 있는 오페라극장은 별로 없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자존심 있는 유럽의 도시들은 오페라극장을 도시 위상의 상징으로 여기며 오페라극장을 많이 개관했다. 특히 이탈리아나 독일 공화국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오페라극장에 이어서 오페라 축제도 이 대열에 가세하였다. 1876년 바이에른에서 열린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를 필두로, 1920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
르크 축제, 1934년 영국의 글린데본 축제가 뒤를 이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당 이탈리아에는 오페라 황금기를 대표하는 3개의 오페라극장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장으로 꼽히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은 1737년 준공되었으나 1816년 불타고 6개 월만에 재건되었다.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 베르디의 오페라가 모두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도시의 운하들 사이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은 1792년에 개관했고, 1836년과 1996년 화재로 황폐화되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재건되어 오늘날까지 불사조란 의미의 피닉스 극장이란 이름으로 건재한다. 베르디가 이 극장에서 초연을 했고, 20세기에 와서는 스트라빈스키와 벤저민 브리튼이 초연을 했다. 오늘날까지 베네치아인은 자부심을 가지고 그 문을 드나든다.
한편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은 오랫동안 이탈리아 오페라의 진정한 고향이 되어왔다. 19세기 모든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그곳에서의 오페라 초연을 희망했고, 베르디만큼 라스칼라 극장에서 많은 초연을 한 작곡가도 없었다. 떠오르는 솔로 가수들에게도 라스칼라 극장에서의 연주는 하나의 중대한 통과의례가 되었다.
라스칼라 극장은 1943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심한 손상을 입었고, 1946년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1년 무대 뒤를 현대화하기 위한 공사로 3년간 문을 닫았으나 화려한 관객석은 대부분 1778년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창시할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유럽 다른 곳에서도 오페라극장들이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불이나 전쟁으로 인해 이 정도의 손실 기록을 가지고 있다. 파리에서는 파리 오페라극장이 1869년 난공불락의 가르니에 궁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6회 이상 화재로 파괴 되었다. 비엔나에서는 1869년 웅장한 빈 궁정오페라극장의 개관에 앞서 몇 개의 오페라극장이 먼저 세워졌다. 1918년 합스부르크 왕족의 몰락과 함께 빈 궁정오페라극장은 빈 국립오페라극장이 되었다. 그 후 나치의 점령하에서는 오페라극장 역할을 계속했으나, 1945년 연합군 폭격 으로 손상을 입고 1955년이 되어서야 다시 문을 열었다.
독일 오페라의 원동력
독일 오페라극장은 불가피하게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많은 시련을 당했다. 오페라극장이 파괴 된 도시의 예로 베를린, 쾰른, 드레스덴,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슈투트가르트를 들 수 있다. 우아한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 국립오페라극장과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은 재건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파괴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독일의 오페라에 대한 헌신일 것이다.
오늘날 독일만큼 많은 오페라극장을 보유한 나라는 없다. 독일은 레퍼토리 시스템 (여러 작품의 연주 목록들을 보유하고 한 시즌에 여러 작품을 돌아가며 공연하는 형태) 이 가장 잘 운용되는 나라다. 때문에 독일은 성악가들이 많은 배역의 경력을 빨리 쌓을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따라서 전 세계의 성악가들이 독일로 향한다.
영국에서도 전쟁으로 인하여 오페라는 일시적인 혼란을 겪었다. 코번트 가든에 있는 왕립오페라극장이 댄스홀로 쓰이고 새들러스 웰 스 극장은 노숙자들을 위 한 대피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858년 준공된 왕립오페라극장은 전쟁에서 살아남아 마침내 1990년대 말 현대화와 증축이 이루어졌다. 새들러스 웰스 극장은 1968년 런던 콜로세움으로 이사하고 197년 영국 국립오페라극장이라고 새롭게 이름지어졌다. 웨일스 국립오페라단은 1946년 창립되었고 , 2004년 카디프만의 웨일스 밀레니엄 센터로 새 롭게 거처를 옮겼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연주가 이루어지는 나라의 언어로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예를들어 파리에는 이탈리아 극장이 있었으나 도니체티와 베르디 조차도 파리 오페라극장에 접근하기 위해서 프랑스어로 된 대본을 사용해야 했다. 사실 어느 나라 관객이나 모국어로 불리는 노래를 듣길 원한다. 오페라극장에 고용된 가수들에게도 모국어로 노래하는 것이 보다 더 쉬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영국 국립오페라, 베를린 코미셰 오페라,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 오페라극장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는 오페라가 원어로 공연된다. 현재 중요한 오페라 무대는 세계 각국의 가수들의 순회 공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런 변화는 불가피했다. 솔로 가수들이 순회공연을 할 때마다 같은 역할의 대사를 그 나라의 언어로 익힐 시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된 대사를 무대 위나 좌석 앞에 준비해놓는 것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해결책이다.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오페라
프라하에서부터 동유럽 전역에 걸쳐 많은 오페라극장들이 세워졌기 때문에 오페라 순회공연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프라하의 에스타트 극장에서 1787년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초연되었다. 러시아 황제 또한 오페라를 원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마린스키 극장을, 모스크바에 볼쇼이 극장을 세웠다. 1869년 카이로 오페라 극장, 18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 1896년 아마존 중심부의 마나우스 오페라 극장, 1911년 프랑스 인도차이나의 하노이 오페라극장이 개관되었다.
이와 같이 오페라의 유행은 열광적으로 퍼져 갔다.
많은 유럽 이민 인구로 인하여 미국 또한 재빨리 오페라를 받아들였다. 서부의 금광 붐이 일어난 도시들에서 먼저 오페라극장이 세워졌다. 뉴욕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이 개관되었고, 그곳에서 곧바로 유럽 최고의 정상급 오페라 가수들을 주연으로 영입했기 때문에 오페라는 대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탄은 1996년 훨씬 더 규모가 큰 링컨 센터로 거처를 옮겼고, 그 후에도 현재까지 스타 배출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미국 대부분의 도시에서도 오페라를 선보였다. 1875년 필라델피아 음악 아카데미 극장은 라스칼라를 모델로 설계되었다. 1906년 지진으로 많은 극장을 잃은 샌프란시스코는 1932년 새로 창단된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의 거처를 전쟁기념 오페라극장으로 옮겼다. 오늘날 시애틀에서 워싱턴,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이애미, 시카고에서 휴스턴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서 오페라극장이 세워지고 있다.
소련의 경우도 오페라는 지위와 정치적 권력을 대표했고, 20세기 중반까지 키예프에서 타슈켄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련 연방은 자국 의 오페라극장을 보유했다. 그리고 그 밖의 나라에서도 각기 자부심을 유지 하고자 계속해서 오페라극장을 개관했다. 1973년 개관한 시드니 오페라극장만큼 상징적인 곳은 없다. 그러나 파리에도 현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이 있고 코펜하겐이나 발렌시아에도 새로운 오페라극장이 있다. 축제 또한 늘어났으며, 인기 있는 축제들로는 영국의 올드버러,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이탈리아의 베로나, 미국의 산타페 등이 있다. 가장 새로운 사실은 아시아에서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커 지고 있다는 것 인데, 도쿄에 오페라극장이 개관되었고, 1998년 상하이에, 2008년 베이징에, 그리고 서울에도 개관될 계획이다 (서울에는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이 이미 1993년도에 개관되었다)
오페라극장의 지배자
오페라극장의 성공 여부는 강력한 지도자에 달려 있다. 18세기 런던에서는 헨델이 직접 극장을 운영하였고,
도메니코 바르바야는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과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틀을 갖추게 하였다.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말러, 라스칼라 극장의 토스카니니.
그리고 좀 더 최근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제임스 레빈처럼 지휘자가 오페라극장을 이끄는 경우도 있다.
1970년대에는 극장 감독이자 작곡가인 롤프리베르만이 파리 오페라극장에 혁신을 가져왔다.
누가 극장의 책임자인가에 따라서 정상급 가수를 앞세울지, 흥미로운 작품을 제작할지,
새로운 오페라를 선보일지 여부가 결정된다.
영원한 잘츠부르크
많은 여름 축제 중에서도 모차르트 탄생지에서 열리는 축제는 확실히 특별한 매력이 있다.
1920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중심으로 시작된 잘츠부르크 축제는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치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번영했다.
전후 시대에는 비엔나 필하모니가 이 축제의 상주 관현악단이었고,
이후 이 축제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 얀이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카라얀은 1967년 잘츠 부르크 부활절 축제를 새로 기획했다.
오늘날 정상급 지휘자들과 관현악단, 성악가들이 연주하는 이 축제는 유럽에서 가장 명성 있는 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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